아빠는 시골의 집배원이었다. 쌀과 감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우리 삼 남매가 자라면서 점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빠는 농번기가 아닐 때는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하셨는데, 하루는 공사 현장에 높게 쌓인 건축자재(벽돌로 기억한다)가 쓰러지면서 아빠의 얼굴을 덮쳤다. 코뼈가 부러지고 볼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하셔서 응급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주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있던 아빠의 모습은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그리고 그 이후 아빠는 더 이상 위험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셨고, 엄마의 권유로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집배원을 시작했다. 1994년, 아빠가 35살이었고 내가 10살 때의 일이다. 아빠는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인이 되면서 당신의 삶의 모습이 획기적으..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행복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찌질하다의 반대말 이 뭔가. 특별하다? 잘나간다? 바지통 6반으로 줄이고 머리에 젤 바르는 상남자 스타일? 아니 찌질하다의 반대말은, 찌질했었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모두, 행복하시라. – 박정민 ‘찌질이’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지질하다’라는 형용사가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내 경험상 이 표현은 흔히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 지질’이라고 쓰지만 발음할 때는 ‘찌질’이라고 된소리로 발음해서 일부러 보잘것없는 느낌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다. 작가는 ‘찌질하다’의 반대말을 ‘찌질했었다’라는 과거형으로 말한다. (이런 특유의 생각을 비트는 ..
한 인간의 성품이나 성향이 만들어질 때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형제(자매 또는 남매) 순위다. 대학교 4학년 가족복지론 시간에 배운 내용인데 다른 건 많이 잊어버렸어도 이 말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내 삶의 경험들 속에서 이미 느끼고 있는 부분이라 피부에 와닿는 말처럼 느껴졌나 보다. 나는 여동생이 둘이다. 내가 첫째, 4살 차이 나는 둘째와 그 보다 2살 어린 막내까지 우리는 3남매다. 우리는 시골에서 할머니, 부모님, 우리 셋 이렇게 6명이 함께 살았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인근의 남중, 여중을 졸업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헤어지나 싶더니 대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 3학년으로 복학을 하니 둘째가 수학과에 들어왔고, 졸업 후 학교 도서실에 처박..
남은 거리 47Km 5번 체크포인트인 운조루에서 어머니의 응원을 받고 나니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그 상태에서 햄버거로 배를 채웠다. 우적우적 빵과 고기를 씹었다. 꿀맛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가는 몸이 걷기 모드에서 해제될 것 같았다. 몸은 지쳐있었지만 빨리 다시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하지만 팀원들보다 먼저 도착한 탓에 나머지 3명을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잠시 후 구급차 한대가 들어왔고 배우 이제훈이 침대에 실려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약 50Km 지점에서 안타깝게도 포기 선언을 했다. 완주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의 얼굴에서 아쉬움과 피곤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팀원들은 내가 도착한 지 1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 몸은 점점 더 편안함을 찾고 있었다. 근처 보도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