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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시골의 집배원이었다.

쌀과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우리 삼 남매가 자라면서 점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빠는 농번기가 아닐 때는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하셨는데, 하루는 공사 현장에 높게 쌓인 건축자재(벽돌로 기억한다)가 쓰러지면서 아빠의 얼굴을 덮쳤다. 코뼈가 부러지고 볼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하셔서 응급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주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있던 아빠의 모습은 트라우마처럼 남았다.

그리고 이후 아빠는 더 이상 위험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셨고, 엄마의 권유로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집배원을 시작했다. 1994, 아빠가 35살이었고 내가 10 때의 일이다.

 

아빠는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인이 되면서 당신의 삶의 모습 획기적으로 변했다.

야외에서 하루종일 일한다는 점에서는 농사나, 건설 현장 노동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공무원 사회의 일원이 아빠는 드디어 어울리는 옷을 입은 사람 같았다. 나는 아빠 덕에 우체국에 자주 갔었고 거기서 다른 집배원, 공무원 삼촌, 이모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들은 모두 아빠를 좋아했고 칭찬했다. 그런 사회적 평판을 받는 아빠가 자랑스러웠고 대단해 보였다.

 

아빠는 아침 출근 시간에  나와 동생들을 등교시키면서 우리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아빠의 차 안에서 들은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았고, 잔소리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공무원이라는 조직사회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자주 말해 주셨는데,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너도 커서 공무원을 해야 한다' 말도 잊지 않으셨다. 때문인지 지금 우리 남매 셋은 각각 다른 지자체에서 공무원으로 앞가림을 하고 있다

 

아빠의 조직 스탠스 철학을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윗사람에게는 예의 바르게 대하되, 부당한 요구에는 항거하라.' 것과 '아랫사람들을 항상 먼저 챙기고 입보다는 지갑을 열어라.' 정도로 요약할 있겠다.

'항거' 사전적으로 '순종하지 아니하고 맞서서 반항함'이라는 뜻인데, 아빠의 무용담을 듣고 있자면 이만한 단어가 없다. 새로 부임한 국장이 집배원들을 무시하는 언사를 보인다 싶으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정신 교육을 시켰고, 아빠의 직속 상사도 아닌 사람이 대뜸 본인을 하대하면 육두문자를 날렸다.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한 아빠가 흥분한 상태로 쏘아보며 목소리로 직언을 해대면,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주변에서 아빠를 질책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때 마음이 맞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본인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술과 음식을 함께하고 정을 쌓는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시골로 부임해 온 국장 내외 분이 우리 집에 오신 적이 있다. 직장 상사이고, 조직 내 최고 결정권자임에도 아빠는 오래 알아온 사람들처럼 대했다. 그래야 빨리 시골생활에 적응하고 서로 편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준비한 음식과 술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함께 보낸 후에는 모두가 우호적 이과 없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감정을 나눈 분들은 아빠가 퇴직한 지금도 때가 되면 서로 연락하고 적당한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는 사이가 됐다. 

 

최근에 동생이 시집을 가면서, 예식장으로 찾아오신 아빠의 옛 직장 동료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중고등교 시절을 봐 오신 분들이라 30대 후반의 내 모습에 놀라시면서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그러다가 아버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고위직에 계셨고 지금도 상급부서에서 일하고 계신 '삼촌' 한 분이 오셨다.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형님은, 야썽이 있어. 야썽"

야썽? 그게 뭐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야성'이었다. 아마도 현역이었을 당시 젊은 아빠를 평가하시는 것 같았다.

화끈한 성격에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똑 부러지는 성품과 추진력을 빗대어 표현하신 것이었다. 격하게 공감했다. 

그 '야썽'이 가정에서 구현될 때는 엄마와 우리 남매들이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직장에서 결단력과 추진력은 분명 아빠가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나는 그런 점을 닮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나는 우유부단하고 끈기가 없는 성격이다. 이걸 인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서 뭐든 거침없이 해내는(것 같은) 아빠를 동경하고 닮고자 했다. 모든 면에서 그런 성격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지만 나도 조직생활을 하고 이것저것 결정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시원시원하게 일처리 하는 아빠의 성격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나는 야성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업무를 추진할 성격은 못된다. 다만 나만의 신중함과 유능함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지금 62세의 아빠는 몸 이곳저곳의 통증을 호소하시면서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누워있어야 허리도 안 아프고 피곤하지도 않으시단다. 점점 아빠의 야성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아쉽다. 최근에는 불교에서 수계를 받고 불경공부도 열심히 하신다. 60세가 넘어 퇴직하신 후 나름 삶의 의미를 찾아 인생을 통합하고 계신 것이다. 야성으로 살아온 60년을 잘 마무리하고 평화로운 노년을 맞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젊은 날 아빠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조금이라도 더 닮았으면 좋겠다. 

 

어쩌다 보니 아빠에게 띄우는 헌정의 글이 돼버렸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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