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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상쾌한 첫 코스
첫 코스는 상쾌한 아침공기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얼마나 많은 참가팀들이 완주를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팀은 당연히 완주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38시간이면 설렁설렁 산책하듯이 걸어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테랑 러너들은 이미 저만치 무리지어 달려가고 있었다. 바리바리 등산가방을 짊어지고 온 우리와 달리 그들은 물을 채우는 조끼만 달랑 걸친 채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몸을 가볍게 움직이며 멀리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팀은 대회 1위를 한 홍콩 팀이었고, 무려 19시간 9분만에 완주했다고 한다. 하루도 채 안걸린 것이다. 아마 200Km도 완주했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고도로
첫 코스는 마을 골목길, 임도 등 한적하고 난이도가 낮은 길로 짜여 있었다. 가장 높은 고도는 해발 500m를 조금 넘었다.
서로 이야기도 많이하고 기념사진도 찍으면서 첫번째 체크포인트인 산수유휴양림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충분히 에너지 보충을 하고 장비도 재정비를 해야했다. 다음이 전체 코스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성삼재를 향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지리산 등산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이 모여있던 여러 팀의 무리들이 점점 쪼개지기 시작했다.
남녀혼성팀은 팀원들끼리도 간격이 벌어졌고 부상자가 하나 둘 나오며 중도 포기를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팀이 다함께 완주하는 것이 대회의 핵심이기 때문에 가장 페이스가 느린 사람에 속도를 맞춰야 했다. 오랫동안 같이 등산을 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이번 트레킹을 위해 급 결성된 모임은 그 원칙을 지키기 힘들었다. 그것은 우리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중학교 친구 A, B 그리고 직장 친구 C와 한 팀이었다. 그 중 A의 페이스가 점점 늦어지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히말라야라도 가는지 갖가지 짐을 다 챙겨 배낭도 엄청 무거웠다. 게다가 출발하기 전에 발목도 약간 다친 상태였다. 반면 나는 몸이 달아 우리보다 앞서가는 팀들을 보고 있자니 불안했고 더 빨리 올라가고 싶었다. 헐떡이는 A의 배낭을 좀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녀석의 짐을 들쳐매고 혼자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나머지 셋은 내가 먼저 올라가면 동기부여가 되서 힘을 더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산에서 남의 짐을 들어주는 것은 되려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배낭을 맡긴 사람이 중간에 힘들어 쓰러지거나, 필요한 물건이 생겼을 때 배낭이 필요할텐데 짐을 덜어준답시고 나처럼 가방을 들고 가버리면 되려 위험할 수도 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별일 없이 (배낭도 없이) 해발 21Km 성삼재 체크포인트에 도착했다.
내리막 지옥
오르막의 지겨움을 끝낸 우리는 가장 힘든 코스를 지나왔다며 서로를 격려했다. 하지만 내리막의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성삼재를 지나 노고단을 찍어 가장 높은 고도에 이른 후(여기서 이제훈 배우와 인사했다! 사진 찍을걸...) 내리막막길 지옥이 시작됐다. 10Km가 넘는 내리막 코스에서 무릎과 발목 통증을 호소하며 여기저기 중도포기자가 속출했다.
전체 10개의 포인트 중 아직 3번째 포인트에 도착도 하지 못했는데 참가팀의 50%가 포기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히 우리팀은 무사히 무릎과 발목을 지켜서 제3번 체크포인트에 도착했다. 그 때가 오후 6시였다. 12시간을 걸을 것이다.
우리는 컵라면과 김밥을 허겁지겁 삼키고 마사지를 받았다. 가까운 대학교에서 물리치료학과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오셔서 참가자들의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살면서 받은 안마 중에서 가장 시원하고 행복했다.
어둠 속으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기념촬영을 마치니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서둘러야한다. 이어지는 4, 5번 코스는 전체 일정 중 절반을 지나는 지점이고 고도가 가장 낮아 비교적 쉬운 길이지만 밤에 통과해야했다. 4번 코스인 목아재는 그저 스쳐지나갔고 빠르게 5번 코스로 향했다. 잘 정비된 임도를 걷는 것이었지만 불타오르는 발바닥을 디딜 때마다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우리팀은 찢어졌다. 내가 가장 먼저 앞장 섰고 나머지 셋은 가장 늦은 친구의 페이스에 맞춰 오기로했다. 5번 포인트에서 나의 어머니가 응원차 기다리고 있었고, 너무 늦게 도착하면 밤새 힘들어하실까봐 지체할 수가 없었다.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흐릿한 랜턴에 의지해 달려나갔다. 혼자 걷는 어둠속 길은 13Km.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더이상 물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목이 타들어갔지만 주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물을 마실 곳도 없었다. 결국 참고참으며 포인트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한 일가족이 참가자들을 응원한다며 수박을 썰어서 나눠주고 있었다.
이미 크고 좋은 조각은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차지했고 나는 작은 꼬투리 하나에 만족해야 했다. 조금 더 걷자 다시 갈증이 심해졌다. 마을 안에 자리잡은 5번 포인트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기가 모내기 철이라서 농수로에는 물이 가득했다. 얼굴을 처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평소에는 수질 때문이라도 마실 생각도 안했을텐데 그 때는 너무 달콤하고 시원했다. 그렇게 겨우 정신을 차리고 포인트에 도착해 어머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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