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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토리/에세이

38시간, 100km의 여정(1)

리뷰에세이스트 2023. 6. 8.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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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산이 좋아질 나이

어릴 때부터 산에 둘러쌓여 살았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 감싸안고 있는 내 고향은 구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병풍처럼 서 있는 큰 산 아래에서 살다보니 상대적으로 산이 없는 탁 트인 동네에 가면 뭔가 어색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군산은 높은 산이 없다.

처음 군산에 갔을 때 '왜 여기는 산이 없지? 지명에 山이 들어가는데?'하고 의아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동네에도 시민들이 즐겨찾는 공원같은 산들이 더러 있긴 했다. 하지만 나에게 산이라면 지리산 정도는 되어야 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군데 다른 지역에서 등산을 해봤지만 지리산 만큼 힘든 곳은 없었다. 눈 내린 한라산을 혼자 힘들게 올라간 적도 있지만 만약 눈이 안내렸다면 훨씬 수월했으리라 생각한다. (눈 내린 한라산은 꼭 혼자서 등반해보시길!)

등산 후에 마셨던 한라산 소주가 날 더 힘들게했..아무튼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산은 10대, 20대에 별 감흥이 없었지만 30대에 들어서니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10대, 20대 때는 특이하고 화려한 것들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문득 30대가 되니 내 옆에 항상 서 있던 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색이 변하면서도 변함없이 서 있는 산에 경외심과 위안을 받았다. 꼭 오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좋았고 산 정상에 눈이 쌓이고 녹는 것을 보며 삼한사온의 겨울 리듬을 가늠하거나 녹음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며 여름의 더위를 어림잡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산에 들어가면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흙냄새가 좋았고 업무에 지쳐 무작정 반차를 내고 산 속으로 차를 몰아 그 안에서 느긋한 커피타임을 가지기도 했다.


 

100Km

이렇게 산을 점점 피부로 느끼기 시작할 무렵. 구례에서 국제적인 트레킹 대회가 열렸다. 이름하여 '옥스팜 트레일워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에서 주최하는 옥스팜 트레일워커는 100Km를 4명이 한 팀이 되어 38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도전 형식의 기부 프로젝트다. 물과 생계를 위해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하고, 팀이 함께 기부금을 모아 참여하는 뜻 깊은 이벤트로 1981년 홍콩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2017년 구례의 지리산에서 대회가 열린 것이다.  

 

같은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중학교 때 부터 가장 친한 친구인 2명을 먼저 설득했다. 그렇게 3명이 모였고, 역시 직장에서 이런 이벤트에 관심있어할 만한 친구 1명을 소개받아 최종적으로 팀을 꾸렸다. 우리는 어차피 잘 아는 동네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이니 무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트레킹팀이 창설된 기념으로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했다. 대회를 5개월 앞 둔 시점이었다.

대회 참가 하루 전 아직은 해맑

첫 연습으로 코스의 1/5인 20Km를 다 함께 걸었을 때 우리는 느꼈다. 

'아 괜히 한다고 했다. 젠장 망했다.' 

주변 지인들로 부터 후원금을 받기 시작했고 100Km를 걷는 도전을 한다며 여기저기 떠벌려놓은 상태였다. 평소에 운동량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연습한답시고 5시간 산행을 했더니 온 몸의 근육이 아우성이었다. 특히 발바닥 통증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걸 5번 반복해야 100Km를 완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며칠 뒤 부터 산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우리는 한 차례 더 연습을 했고 이번에는 40Km정도를 걷고 난 후 이번에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출발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트레킹워커 대회 당일! 새벽 5시에 도착한 출발 지점은 영국, 홍콩, 뉴질랜드, 미국 등 전세계에서 모인 참가인원으로 북적였다. 이런 국제적인 대회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다. 선한 의지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다 모여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옥스팜의 홍보대사인 배우 이제훈, 이하늬 배우도 보였다. 그 중 이제훈 배우는 함께 100Km코스에 참가한다고 했다. 참 신기한 일의 연속이었다. 배우랑 같이 등산을 하다니!! 출발시간이 다가 올 수록 긴장되고 설랬다. 그리고 마침내 총 512명의 참가자들은 다함께 파이팅을 외치며 새벽 6시의 지리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38시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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